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문단 편집) === 문제점 === 결론부터 말하면, '''술라의 개혁은 명분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전부 실패했다.''' 술라 개혁은 법정 개혁 외에는 그의 목적처럼 항구적으로 로마 국제에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개혁은 공화정 체제의 종말을 가지고 왔다는 평이 따라올 정도로 여러 문제를 낳았다. 우선 술라의 발호 자체가 아무런 집권 정통성이 없었으며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 집권의 정당성 마찬가지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에서는 발동 즉시 로마시민권자를 재판없이 사형시킬 수 있는 원로원 최종권고의 위헌성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술라는 그 원로원 최종권고조차 없이[* 사실 술라는 원래라면 그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아야 하는 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군대를 일으켜 조국 로마를 짓밟고 노예부대를 동원해 살생부에 오른 반대파를 불문곡직 쳐죽였다. 게다가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고도 반대파가 도심 투기장에 짐승떼처럼 몰려 살해당하며 지르는 비명은 숫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협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결과적으로 술라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원로원에 대한 존중은 털끝만큼도 없는 공포정치 그 자체였는데 아무리 옵티마테스들이라 한들 술라를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 술라 본인이 개혁을 마친 후 깨끗하게 권력을 내려놓았다고야 하지만 살아있는 술라는 사실상 태상황이나 다를 바 없어서 아무도 술라를 생전에 비판하지 못했다. 결국 로마 공화국의 흉흉한 공포분위기는 술라가 죽고 나서야 폼페이우스같은 '술라 키즈'들과 온건파 옵티마테스들에 의해 진정되었다. 또한 술라는 반대파에 대한 효율적인 학살을 위해 무제한적이고 무분별한 사적 폭력을 동원했는데 이는 원로원 권위 회복 공로 따위로는 가릴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였다. 애초에 공권력으로는 반대파 탄압을 적법하게 할 수없으니까, 술라는 군대를 동원해 협박으로 얻어낸 묵인 하에 노예로 이루어진 인간사냥대를 창설하고 살생부를 작성해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의 민중파 유지들을 불법으로 학살했다. 즉 노예들이 그 많은 사람에게 무슨 약탈 강간 폭행을 가하든 모조리 죽여주기만 하면 상관 안했던 것이다. 아무리 반대파라지만 어젯까지 한솥밥 먹던 동포들이 버젓이 그런 꼴을 당해나가는데다 민중파라고 해서 다 시장바닥 출신인 것도 아니고 명가 출신 포퓰라레스나 옵티마테스와 혼맥으로 얽힌 평민 유력자도 많았으니 옵티마테스들도 속으로는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술라는 원조 명문귀족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중 집정관 경험자인 루키우스가 원로원파라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의 조카라는 이유로 스무살도 안된 장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를 죽여 없애려고 했고, 가이우스가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그대로 척살령을 내렸다. 그 가이우스는 본인이 명문귀족인데다 역시 명문귀족인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의 외손이었고 무엇보다도 '''술라가 젊어서 사별한 아내 율리아 카이사레아의 친정집 장손'''이었으니 술라가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는지 보여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오랜 도피생활 끝에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과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 그리고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의 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본질적으로는 술라는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귀족층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민중파들의 권한을 철저히 축소시켰다. 따라서 민회가 법안을 가결하는 권한을 박탈하고 호민관의 거부권과 이들 호민관이 '''명예로운 경력'''의 다른 공직에 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문제는 공화정이라는 것 자체가 이들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정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켜 놓아도 여전히 명예로운 경력의 공직자들은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정부는 민심에 기반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연히 소 카토처럼 민중을 위한 법을 거부하는 정치가는 절대 선거에서 이길 수 없었고 인기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카토는 집정관에 당선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소 카토는 원로원 의원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라티푼티움을 회수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나눠주려는 민중파의 정책을 막았던 과격한 인물이었으므로 원로원파 내부에서는 목소리가 가장 컸다.]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에서 민중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결국 이런 요인들로 인해 술라의 개혁이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고 실제로 술라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폐지되고 원상복귀된다.[* 이것을 폐지한 정치가들은 다름 아닌 술라 밑에서 한몫 잡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웃기는 점은 이들은 술라의 개혁과 법령을 무시했는데 정작 카이사르는 술라가 정한 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것이다. 술라가 만든 법에 의하면 원래 명예로운 공직에 나서기 위해서는 나이 제한이 있는데 폼페이우스는 편법과 불법으로 이를 피해갔지만 카이사르는 법에 따른 나이에 출사했다.] 또한 술라는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숙청했으나 이것도 실상 쓸데없는 노력이나 다름없었다. 이유는 민중파라는 것은 단순한 세력집단 같은 것이 아니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로마 평민들과 이탈리아인들의 요구에 응답한 정치가들과, 그들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민중파의 효시는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같은 세대'''이고 포에니 전쟁 이후에나 등장했으므로 술라의 등장 시기와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민중파라는 것 자체가 로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언가가 아닌, 당시 시대상 필요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었다.][* 키케로의 정적인 클로디우스처럼 원래는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스스로 평민이 되어서 민중파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민중파 인사들을 발본색원해 봤자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또 다른 인물을 대표로 내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새로운 민중파 정치가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술라가 9,000명이나 제거해서 얻은 것이라곤 그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새로운 민중파 정치가들이 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은 효과 정도에 불과하였고[* 그나마도 고작 십대에 불과했던 카이사르가 대놓고 민중파임을 인증하면서 술라에게 개겼던 걸 봐도 그리 효과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로마 공화정을 강화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당시 민중파가 자꾸 위협적으로 성장한 것은 원로원의 전횡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귀족들은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그로 인해 로마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넘쳐 결국은 중산층으로 제대로 된 군단병을 구성할 수 없게 되자 군단병을 빈민층으로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사회가 점점 이 지경이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이러한 것을 방관하였고 로마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강력한 호민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국유지 분배'''를 위한 농지법을 추진하자 이들을 향해 ''''[[원로원 최종권고]]''''를 이용해 무분별하게 학살함으로써 이를 억눌렀다. 마리우스가 등장하여 무산자들인 군단병들에게 퇴직금으로 토지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원로원은 '''절대로 줄 수 없다'''라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즉, 원로원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없이 로마가 전쟁을 통해 획득한 넓은 영토를 자신들이 가로채 이를 바탕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부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려는[* 이 토지를 획득한 건 다 로마군이 피를 흘리면서 로마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었고 로마군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로마의 평민들이었다.] 민중파의 유력 정치가들을 살해하면서 맞서온 것이었다. 즉, 강력한 민중파 인사가 등장하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로마 평민들의 불만인데, 근시안적으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응해봤자 제2의 그라쿠스 형제, 제2의 마리우스는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개혁의 한계였다.[* 실제로 민중파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풀비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등등...] 더군다나, 술라의 개혁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래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로마군의 사병화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는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정 말기에 로마에서는 연이어 유혈사태가 벌어지는데 이는 유능한 장군들이 자신의 군단병들을 사병처럼 부려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든 사람은 바로 술라 본인이었다. 이렇게 사병화가 진행된 이유로는 중산층 자영농의 붕괴로 로마 군단병이 무산자들로 구성되면서 그들의 생계가 달린 봉급과 퇴직금 문제를 전적으로 그들의 군단 사령관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즉, 로마 군단병과 군 사령관의 관계는 '''[[용병]]단과 용병단장''' 비슷한 관계였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병 문제도 결국은 위의 토지 분배 문제에 수렴된다. 부패한 원로원이 토지 분배를 막은 탓에 먹고 살 수 없게 된 병사들이 자신의 사령관에게 생계를 의지하게 된 것이므로.][* 그리고 술라 자신도 이런 용병대장이나 다름없었으니 애시당초 위기감을 가지기나 했을지조차도 의문이다.] 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군단병 개인에 대한 봉급과 퇴직금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사령관이 아닌 정부가 지급하게 함으로써 사병화되는 길을 막는다.[* 클레오파트라 사후 이집트 왕가를 해체하고 그 영토는 황제 직할령으로 삼아 막대하게 생산되는 밀을 퇴직병에게 봉급으로 지급한 것이다. 물론 이집트 뿐 아니라 기타 여러 곳을 황제 직할령으로 만들긴 했지만.] 따라서 제정 시대로 돌입하면서 더이상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 같이 사병화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중앙정부의 수장인 황제가 암살당해서 일시적으로 황제 자리가 공백 상태에 빠지면 각 지역의 군사령관들이 황제의 지위를 노리는 내전에 빠진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 외 수많은 군인 황제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로마 제정의 모순점으로 인해 생긴 문제지 술라의 개혁의 문제점과는 큰 관련성은 없다.] 술라의 개혁에선 이렇게 심각한 문제였던 로마 군단병에 대한 처우 문제가 빠졌고 그로 인해 술라가 물러난 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가 사병화된 군단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는 술라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술라는 섬세한 지도자라기보단 무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에트루리아 사람들에게서 영토를 몰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 건국 때부터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로 이때는 완전한 로마 시민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치하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시민들이었으며 따라서 이들로부터 땅을 몰수한 것은 정치적 파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다.][* 비슷한 짓을 옥타비아누스도 한 적이 있긴 한데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안으로는 풀비아의 정치 공세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봉쇄 때문에 식량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로마 시민들의 폭동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대로부터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위기상황에서 이지선다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술라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렇듯 술라는 로마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긴 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엔 전혀 접근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개혁은 사후 모조리 묻혀버리고 만다. 술라가 남긴 것이라곤 이탈리아 공화국과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진압한 군사적 업적 및 원로원와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로마 군단병으로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훗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만 있다고 해도 좋았다. 이를 증명하듯 술라가 은퇴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한 이후, 그의 부하이자 내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겼던 [[크라수스]]나 [[폼페이우스]]는 후에 민중파를 자처하면서 진짜 민중파였던 [[카이사르]][* 마리우스의 친척이었으며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수차례 비판하는 등 민중파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물론 당시 정치적 명분이 여기에 있기도 했지만 반대파 탄압에 혈안이 되있던 술라와 원로원에 정면으로 맞선 것 자체가 꽤나 대범한 행적이다.]와 [[삼두정치]]를 이끌었고 술라파로 불린 세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술라가 만들어 놓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활용했다. 거기에 공화정을 전복할 큰 요소였던 사병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군대에는 빈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많은 비중을 가지게 되어서 민중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게 된다.]는 점점 가속화되어 원로원은 술라의 바람과는 달리 그 힘을 점점 잃어갔으며, 결국은 이를 바탕으로 한 '''프린키파투스'''[* 원수정,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실질적으로는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은 어디까지나 특권 있는 로마 1시민인 프린켑스라 강조했으며, 단 한번도 자신을 왕이나 황제 비슷한 용어로 지칭하지 않았다.]]]가 탄생하게 된다. 술라 입장에서 더 큰 불행은, 그가 선례로 남긴 정적 숙청 방법과 공화정 체제의 운영 원리가 기원전 29년과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제안해 통과시킨 1차 조정헌법, 2차 조정헌법에 휼륭한 선례가 됐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란, 카이사르 체제라는 뼈대 위에 술라 체제 혹은 술라 개혁의 살을 붙이고 여기에 원로원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장식한 술라 이후의 공화정 체제이면서도 1인 종신 집권이 당연시된 형태의 로마식 제정이기 때문이다. 즉, 술라의 개혁의 목적은 공화정 체제의 복구와 수호였지만 결국 그의 개혁은 끝내 공화정을 종식시킨 로마식 제정의 시조가 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